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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최후

살리는사람 2009. 2. 28. 11:12
고속정 참수리 357호의 최후
전직 해군 고위 지휘관의 증언 : 『도망치는 敵船, 예인하는 敵船을 쏘지 않은 것은 어떤 논리로도 해명할 수 없는 海軍의 실수. 상황이 어떻든 현장 지휘관들은 북한 경비정 두 척을 격침시켰어야 한다. 영국의 해전 규칙으로 볼 때 우리 해군의 대응은 비겁 무능』

(이 기사는 월간조선 2002년 8월호에 실려 있습니다.)

金容三 월간조선 전략기획실장 (dragon03@chosun.com)
김용삼 
「2분 대기조」 출동
해군 해난구조대가 2002년 8월 21일 오전 연평도 서쪽 14마일.북방한계선 남쪽 5마일 해상에서 서해교전 때 침몰한 고속정 참수리 375호를 끌어올리고 있다.(조선일보선정 2002 국내10대뉴스)
2002년 6월29일은 세계인의 축구 잔치인 월드컵이 막바지로 치닫던 날이다. 마침 이 날 저녁에는 韓國戰 당시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전투병력을 派兵(파병)하여 대한민국을 공산 침략의 위기에서 구해준 터키와 한국이 월드컵 3·4위 결정전을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응원 준비를 하던 날이었다.

새벽 6시30분.

바다는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파고 0.5m, 視程(시정)도 양호했다. 연평도 기지에 배속된 해군 고속정(PKM·Patrol Killer Medium) 3개 편대(고속정은 두 척이 1개 편대를 이룬다-편집자 注)는 새벽밥을 지어먹고 어선 보호를 위해 연평 어장으로 향했다.

고속정들은 북방한계선(NLL·Northern Limit Line) 남쪽의 조업통제선 북쪽에서 잔잔한 바다를 미끄러지듯 달리며 막바지 꽃게잡이에 나선 우리 어선들의 조업을 보호하고 있었다.

오전 9시37분.

고속정 232편대 예하의 참수리(PKM) 357호 艇長(정장) 尹永夏 대위는 함교에 있는 레이더 스크린을 주시했다. 그 때 레이더에 북한 육도 부근에서 점 하나가 시속 20노트로 남하하는 모습이 포착됐다(후에 155t급 경비정 388호로 확인됨).

9시46분. 고속정 232편대(참수리 357·358호)의 편대장 金燦 소령은 북한 388호 경비정보다 서쪽으로 7마일 떨어진 등산곶 부근에서 또 하나의 점(후에 215t급 경비정 684호로 확인됨)이 시속 17노트 속력으로 남하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9시54분. 먼저 남하한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하자 해군의 「2분 대기조」인 고속정 편대 중 右翼(우익)에 위치한 253편대(참수리 328·369호)에 긴급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2함대사령부에서는 위기 조치반이 가동됐다. 잠시 후 253편대장은 『敵船(적선)의 번호는 388호, 155t급 육도 경비정』이라는 내용을 보고했다.

10시01분. 등산곶에서 출발한 북한 경비정도 NLL을 침범하자 尹永夏 대위가 소속된 232편대가 전투배치를 하고 긴급 발진했다. 대원들은 잔뜩 긴장한 채 40㎜와 20㎜포를 연발사격 모드로 전환했다.

고속정이 30노트로 속력을 높이자 스크류가 바닷물을 차고 나가는 힘 때문에 배 뒤편에 물기둥이 솟구쳤다.

10시14분. 253편대가 북한 경비정 388호에 1000야드 가까이 접근하자 NLL을 1.8 마일 정도 침범했던 388호는 뱃머리를 돌려 곧바로 북상했다.

尹永夏 대위의 참수리 357호는 등산곶에서 출발한 경비정 쪽으로 접근해 갔다. 북한 경비정은 이미 NLL을 3마일이나 침범해 들어와 있었다. 북한 경비정을 향해 경고방송, 시위기동과 차단기동을 위해 1000야드(914.4m) 이내로 접근을 시도했다.

선두의 358호에 탑승한 편대장 金燦 소령과 300야드(약 274m) 쯤 떨어져 뒤따라오던 357호의 尹永夏 대위는 북한 경비정의 함 번호 「684」를 확인했다.

배 전체가 검은색으로 보이는 684호는 함수 부분에 탱크 포신같이 육중한 포를 달고 있었다. 이런 포를 단 경비정은 그 전까지는 본 적이 없었다(후에 확인된 바에 의하면 684호는 1999년 6월 연평해전 당시 우리 해군의 집중포화를 얻어맞고 半破돼 기동불능 상태에 빠졌다가 예인된 것이다. 그 후 소련제 T-34 전차포로 무장하는 등 수리 개조를 한 다음 6월29일 처음으로 NLL을 넘어온 것임-편집자 注).

북한 경비정 684호는 SO-1급 중형 경비함(PCF)이다. 북한 해군 8전대 예하의 등산곶(황해도 해주 근방)에 소속된 이 배는 중량 215t, 최대 속력 28노트에 길이 42m로 승조원은 50여 명.

북한 경비정은 조준과 사격을 수동으로 하는 구식 포로 무장하고 있기 때문에 포 요원들이 갑판에 노출되어 있다.

반면에 우리 고속정과 초계함은 모든 포가 컴퓨터 사격통제장치(WCS·Weapon Control System)에 의해 정밀 조준되고, 자동 연발 사격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단위 발사속도가 북한 경비정에 비해 월등히 빠르다.

북한 경비정은 화력 면에서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우리 고속정과 근접 조우하거나 북방한계선을 넘어와 우리 고속정이 차단기동에 들어가면 포신을 하늘로 올려 적대행위 의사가 없다는 표시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金燦 소령은 지난 1월 232편대장에 취임했는데, 그가 지휘를 맡은 후부터 北 경비정들이 NLL을 越線(월선)할 때는 모든 포를 정조준한 채 공격적인 성향을 드러내곤 했다.


기습공격

해군 해난구조대가 2002년 8월 21일 오전 연평도 서쪽 14마일.북방한계선 남쪽 5마일 해상에서 서해교전 때 침몰한 고속정 참수리 375호를 끌어올리고 있다. 총알자국과 85mm포 자국으로 조타실이 벌집이 된 참수리 375호의 모습.
金燦 편대장이 승선한 참수리 358호가 북한 경비정의 500야드(약 457m) 전방까지 접근하여 『당신들은 북방한계선을 월선했다. 즉각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주기 바란다』고 경고방송을 하고 점멸등을 통해 경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북한 경비정은 12노트 속도로 남하를 계속했다.

고속정 승조원들은 NLL을 넘어 불법 월선한 북한 경비정을 때리지 못하고 『돌아가 달라』고 경고방송 및 차단기동을 해야 하는 자신들의 신세가 처량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오래 전부터 2함대의 구호는 「一戰을 불사하라」는 것이었다. 과거에 북한 경비정의 NLL 월선 보고를 받은 어떤 해군참모총장은 『뭘 망설이나. 즉각 쏴버려』 라는 지시를 내릴 정도였다.

그러나 金大中 정부가 햇볕정책과 남북 화해무드 조성에 정권의 命運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현장 지휘관들이 공세적이고 적극적인 작전을 감행할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 있는 것일까.

10시25분.


尹永夏 대위는 북한 경비정의 뱃머리에 달린 육중한 85㎜포와 조타실 뒤편의 14.5㎜ 기관포, 후갑판에 위치한 37㎜포가 자신들을 노려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저들이 뭔가 작심하고 내려오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尹대위는 金燦 편대장이 지휘하는 358호 고속정이 시속 12노트(약 21.6km·1노트는 시속 1.852km)로 남하하는 북한 경비정 684호의 船首 앞을 가로지른 후 커브를 그리며 돌아 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그 뒤편에서 항해하던 357호가 25노트 속력으로 북한 경비정의 船首 부분에 왼쪽 측면을 노출시킨 채 지나가려는 순간 북한 경비정에서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고막이 찢어질 듯한 포성이 들렸다.

포탄이 조타실에 명중하면서 화재가 발생했다. 조타실에 있던 대원들의 몸에 불이 붙어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357호 대원들은 피격 직후 조건 반사적으로 반격에 나섰다. 40㎜함포와 20㎜포, M-60 기관총, K-2 소총 사수들은 미친 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조타실과 기관실이 피격당해 電源이 끊기자 포 요원들은 수동 모드로 전환하여 사격을 했다. 조타장비가 고장난 357호는 오른쪽으로 빙빙 돌았고 적함이 계속 쫓아오며 사격을 해댔다.


31분간의 장렬한 전투


다음은 與野의 6·29 서해 사건 진상조사위원장인 千容宅 의원, 姜昌熙 의원, 그리고 232편대장 金燦 소령을 비롯해 232편대 승조원들의 증언을 정리한 것이다.

<병기장 황찬규 중사는 탱크 포신 같은 함포에서 불이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온갖 총포탄이 눈앞으로 날아오는 모습을 보았다. 적이 발사한 포탄이 조타실을 때린 후 몇 발이 좌현 근처 수면에 탄착을 이루며 날아오는 것으로 보아 적들은 정확히 조준한 상태에서 기다렸다가 기습을 감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거듭 날아온 포탄이 기관실과 船尾(선미)의 후타실을 강타하면서 통신체계가 마비됐고 전원이 나가자 황중사는 40㎜포를 수동 모드로 전환하여 적을 향해 쏘았다.

尹永夏 대위가 쓰러지면서 副長 이희완 중위가 지휘권을 행사했다. 李중위는 자신도 포탄 파편에 맞아 한쪽 다리뼈가 으스러졌고 다른쪽 다리는 파편이 관통당하는 重傷을 입고도 고통을 참아가며 『침착하라! 흥분하지 마라! 계속 쏴라!』 하면서 대원들을 지휘 독려했다. 船尾 부분에 포탄이 명중하여 조타기가 고장나자 『조타기를 수동으로 조작하라』고 명령했다.

조타실에 명중한 포탄의 충격으로 잠시 기절했던 전탐장 韓正吉 중사는 함교로 올라갔으나 화약냄새와 연기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韓중사는 갑판으로 내려오다 병기장 황찬규 중사가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다. 韓중사는 그를 가슴에 끌어안은 채 우박처럼 쏟아지는 포화 속에서 적진을 향해 응사했다.

권지형 상병은 포탄 파편에 맞아 왼쪽 손가락 다섯 개가 너덜거렸으나 통증도 느끼지 못한 채 방탄조끼 끈으로 팔목을 묶어 지혈을 한 다음 왼쪽 팔뚝에 K-2 소총을 얹고 한 손으로 탄창을 갈아 끼우며 결사적으로 응사했다. 오른손으로 갈아 끼운 탄창이 네 개나 됐다. 통신장 이철규 중사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김용태 상병에게 총알이 날아오는 것을 보고 즉시 몸을 덮쳐 김상병 대신 자신이 등에 총상을 입었다.

보수장(배의 수리를 전문으로 하는 직종) 박경수 하사는 M-60 기관총 사수 박진성 하사가 쓰러지자 그곳으로 달려가 대신 M-60 기관총을 잡고 정신 없이 갈겨댔다. 사격이 끝났을 때 자신의 옆에 있던 徐厚源 하사(내연사)는 이미 숨이 끊겨 있었고, 자신의 양팔에 파편이 박혀 선혈이 낭자했다.

갑판 아래 기관실에도 포탄이 명중해 구멍이 크게 뚫렸고 총알이 우박처럼 날아와 박혔다.

기관사 김현 중사는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졌다. 20㎜포 사수 趙天衡 하사는 포탑에서 끝까지 응사하다 포탑이 불길에 휩싸였다. 趙하사와 함께 포를 쏘던 黃道顯 하사는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아 머리의 3분의 1이 날아간 채 숨졌다.

이희완 중위가 외치는 『정장이 위험하다』는 소리를 듣고 누군가가 함교로 뛰어 올라가 희미하게 숨이 붙어 있던 尹永夏 대위에게 인공호흡을 시도했으나 잠시 후 맥박이 끊겼다>


2~3분 사이에 北 경비정 무력화되다


357호 고속정이 격렬한 타격을 받는 순간 북한 경비정의 배후로 돌아갔던 金燦 소령은 자신의 배를 향해 포가 발사된 줄 알고 즉각 대응사격 명령을 내렸다. 불과 1~2초 사이에 358호의 全 화력이 북한 경비정을 향해 집중되자 북한 경비정 함교에서 불꽃이 튀면서 화염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358호 艇長 최영순 대위는 북한 경비정의 함수와 함미포 쪽에 우리 고속정이 발사하는 포탄이 명중하여 화염과 연기가 발생하는 모습을 보았다.

358호가 집중사격을 가하자 북한 경비정은 기동력을 상실한 357호의 뒤로 붙어 358호의 사격을 방해하려 했다. 358호 고속정은 북한 경비정을 계속 추적하며 집중포화를 퍼부었다.

정신은 멍하고 고막을 때리는 포성과 총성….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金燦 소령은 불과 2~3분의 시간이 두 시간이나 되는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 격렬했던 공방전은 불과 2~3분 사이에 결판이 났다. 북한 경비정에서 가끔씩 소총 총알이 날아올 뿐 포탄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다. 우리 고속정이 발사한 포탄에 의해 북한 경비정 갑판에 있던 30여 명의 포 요원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포탑이 날아간 때문이다.

金燦 편대장은 2~3분 사이에 적 경비정이 무력화됐고 전투는 사실상 종료됐다고 판단했다. 장전했던 포탄과 탄약이 떨어진 358호 고속정은 좌우의 우리 고속정 편대에 지원사격을 요청한 다음 再장전을 위해 뱃머리를 돌려 일시 남하했다. 그때까지 발사한 포탄은 357호가 40㎜ 6발, 20㎜는 장전된 탄약 대부분을 발사했으며 358호는 40㎜ 38발, 20㎜ 1050발이었다.

10시30분. 358호가 교전구역을 벗어나면서 左翼(좌익)에 있던 256편대(참수리 327·365호)가 교전 현장으로 다가오며 4500야드 거리에서 敵 경비정을 향해 사격을 개시했다. 3분 후에는 먼저 NLL을 월선했던 북한의 육도 경비정(388호)을 맡았던 253편대(참수리 328·369호)도 뱃머리를 돌려 4000야드 거리에서 사격을 개시했다.

후방에 배치돼 있던 초계함(PCC) 제천함이 30노트 속력으로 교전 현장으로 북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제 시각에 현장에 도착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제천함은 10시43분이 되어서야 교전 현장에서 1만1200야드 거리로 올라와 76㎜ 함포 32발, 40㎜ 함포 184발을 발사했다. 10시47분부터 진해함(PCC)도 1만4800야드 거리에서 76㎜ 함포 21발을 발사했다.

76㎜ 함포의 유효 사거리는 8km 내외. 유효 사거리 내에서 발사할 경우 명중률이 80% 이상이며 파괴력도 대단하지만 유효 사거리를 벗어나면 명중률과 파괴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함포는 유효 사거리 내에서는 포탄이 빨랫줄처럼 直射로 날아가지만 유효 사거리를 벗어나면 포물선을 그리며 曲射로 날아가기 때문이다.

격전이 벌어진 현장에서 불과 1~2분 거리의 덕적도 상공에는 우리 공군의 KF-16 전투기 두 대가 초계 비행을 했고 곧바로 F-4 팬텀기도 합류했다. 근처 섬에 대기 중이던 해군의 對潛 헬기 링스는 적 함정을 공격할 수 있는 空對艦(공대함) 미사일을 싣고 비상 대기상태에 들어갔으나 무슨 까닭인지 출격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다.


피에 젖은 357호 갑판


10시33분. 再장전을 마치고 북상한 358호는 이미 적 경비정을 제압했다고 판단, 만신창이가 된 357호 고속정 예인작업에 착수했다. 金燦 편대장은 357호를 예인 줄로 묶은 다음 13~15노트로 교전지역 남방 2000야드의 안전지역으로 예인했다.

金燦 편대장은 358호를 357호의 좌현에 계류한 후 357호 고속정으로 건너갔다. 357호는 침수로 인해 한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조타실과 통신실은 아직도 화염에 휩싸여 검은 연기를 뿜고 있었다. 부상자들의 피 묻은 살점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고, 부상자와 전사자들이 흘린 피가 갑판을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358호 승조원 안지남 하사가 357호 갑판으로 뛰어 올라가자 갑판 곳곳에서 화염이 치솟고 있었다. 안하사가 화염에 휩싸인 20㎜ 함포실의 유리문을 도끼로 부수고 들어가 보니 趙天衡 하사는 함포 방아쇠에 두 손을 얹은 채 전사해 있었다. 黃道顯 하사는 포탄에 맞아 머리 일부가 날아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357호는 조타실이 대파됐고, 흘수선 부근에 명중탄을 맞아 기관실에 지름 20㎝의 구멍이 뚫려 계속 물이 새 들어왔다. 또 후타실에 지름 5㎝의 구멍이 여러 개 나 있었다. 흘수선 부근의 구멍으로 海水가 유입되는 것이 큰 문제였다. 357호 생존자들은 결사적으로 기관실에서 물을 퍼내기 위해 배수펌프를 가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퍼내는 물보다 쏟아져 들어오는 물이 더 많아 배가 우현으로 계속 기울자 金燦 편대장은 328호 고속정에 지원을 요청, 328호를 357호의 우현에 계류시켜 중심을 잡도록 했다.

金燦 편대장은 생존자와 부상자, 그리고 전사자들을 갑판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부상한 대원들이 비명을 지르거나 살려달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들 눈빛은 야수와 같다고 느꼈다.

전사 4명, 부상 19명, 실종 1명이란 보고를 받은 金燦 편대장은 맥이 풀렸다. 아끼던 부하 지휘관 尹永夏 대위의 시신을 보는 순간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358호는 곧바로 전사자와 부상자를 연평도로 후송했고, 고속정 328호는 피격당한 357호의 예인 임무를 맡았다.

10시43분. 358호 고속정이 피해를 당한 357호의 예인과 부상자 후송을 위해 교전지역을 이탈하면서, 대응 임무를 맡은 256편대(참수리 327·365호)와 253편대(참수리 328·369호)의 집중 포격을 받은 북한 경비정 684호는 화염에 휩싸인 채 船首(선수)를 北으로 돌려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북한 경비정이 한쪽으로 기울며 기동력을 상실하자 먼저 NLL을 침범했던 육도 경비정이 내려와 684호를 예인하는 모습이 우리 고속정 레이더에 의해 관측됐다.


왜 안 쏘았을까?


고속정 편대는 이 상황에서 북한 경비정 684호와 예인함정 388호를 향해 사격하지 않았다. 충분한 유효 사거리 내에 위치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속정 편대장들은 왜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았을까?

북한 경비정이 NLL을 넘어 퇴각한 후인 10시56분 2함대사령관은 현장에 있던 全 전력에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다.


북한 경비정이 퇴각하기 직전인 10시48분, 교전 현장으로 접근하던 제천함의 전파 탐지기가 북한 유도탄정의 스틱스 艦對艦(함대함) 미사일(사정 거리 46km) 공격 징후 전파를 포착했다. 제천함은 미사일 회피 기동을 위해 지그재그로 달리며 상공에 레이더파 교란용 금속파편(채프)을 발사했다.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11시00분 2함대사령부는 교전 현장에 전개되어 있던 우리 고속정에게 미사일 발사 징후를 알리고 전속으로 남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교전이 종료된 지 30분쯤 지난 11시25분에는 등산곶에 배치된 실크웜 地對艦(지대함) 미사일에서 공격 징후 전파가 제천함과 진해함의 전파 탐지기에 포착돼 두 초계함은 또 다시 채프를 발사했다.

11시6분. 공군 제6전대 소속 HH-60 헬기가 적의 레이더파 탐지 방해 장비와 기관총, 탄약을 장비하고 연평도 현장으로 출동했고 11시46분에는 부상자 수송을 위한 HH-47 헬기 출동명령이 하달됐다. 두 헬기가 연평도에 도착하여 싸늘하게 식은 尹永夏 대위의 시신을 비롯한 전사자와 부상자를 만난 것은 낮 12시16분과 12시40분. 피투성이가 된 사상자들을 태운 헬기는 오후 2시1분 경기도 성남의 국군 수도병원에 도착했다.

고속정 328호에 의해 예인되던 357호는 계속되는 침수로 급격히 기울기 시작했다. 328호 정장은 이러다 328호마저 위험할지도 모른다고 판단, 예인을 포기했다.

11시59분 참수리 357호는 연평도 근해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2함대가 편안하면 국가가 편안하다


西海 수도권 해역의 방어를 담당하는 해군 2함대는 바람 잘 날 없는 곳이다. 작전구역이 워낙 방대한데다 해안선이 복잡하고 조수간만의 차가 큰데다가 「한반도의 화약고」라 불리는 NLL이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2함대가 편안하면 해군이 편안하고, 해군이 편안하면 국가가 편안하다」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2함대 사령관을 역임한 安炳泰 前 해군참모총장(한국해양전략연구소 상임고문)은 『NLL을 둘러싼 남북간 무력충돌의 교훈은 우리가 북한보다 군사력이 약하거나 NLL을 사수해야 한다는 지도층의 의지가 약해지면 북한은 반드시 그 틈새를 노리고 월선 도발을 자행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해군력이 북한을 압도했던 1960~70년대 초만 해도 북한은 NLL을 넘어올 엄두를 못 냈으나 1970년대 초 북한이 소련으로부터 오사·코마급 미사일 보트를 제공받아 힘의 균형이 깨지자 NLL 월선 도발을 감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975년 2월26일 기관총으로 무장한 북한어선 10척이 NLL을 침범하자 긴급 출동한 우리 구축함인 서울함(DD-92)이 무장 어선 한 척을 함수로 들이받아 격침시켰다. 북한의 무장 어선이 격침되자 북한의 오사·코마급 미사일 보트 40척이 대오를 이루어 전속으로 남하했고, 공중에서는 미그 전투기들이 위협비행을 하는 등 전쟁 일보직전 상황까지 간 적도 있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오사·코마급 미사일 보트에 대항하기 위해 학생들의 성금을 모아 한국형 고속정을 건조했고, 이 고속정에 프랑스제 엑조세 미사일을 장착하여 西海에 배치하자 북한은 NLL 침범을 단념했다. 북한이 다시 NLL을 침범한 것은 對北 유화론의 환상에 빠졌던 金泳三 정부 시절부터였다.

李基澤 前 연세大 교수는 북한이 NLL 지역에서 도발을 자행하는 이유는 미군의 자동개입을 담보하는 美 지상군이 주둔하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북방한계선의 모호성 때문으로 분석했다. 西海에서 해군력을 강화하고 있는 중국과의 충돌을 우려하는 미국의 입장 때문에 西海상에서 美 해·공군의 활동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는 점 때문이라는 것이다.

李교수는 『북한이 대청도~연평도 사이의 공해상에서 NLL 침범 등 저강도 분쟁(low intensive conflict)을 일으키고 이것이 남북 간 군사적 충돌로 이어질 경우 미국은 韓美상호방위조약의 방위 의무지역에 대한 애매성 때문에 군사행동에 제약을 받을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이것은 북한 입장에서 보면 NLL 부근은 미국의 보복을 받지 않으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 군사적 목적을 성취할 가능성이 높은 지역인 셈이다.

1999년 6월15일 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 고속정과 초계함은 북한 어뢰정 한 척 격침, 420t급 함정 완파, 중형 경비정 두 척 반파, 소형 경비정 두 척 기관실 파손 등의 피해를 입혔고 북한 해군 병사 100여 명을 死傷(사상)하는 등 완승을 거두었다.

이번에는 우리 측 고속정(150t) 한 척이 침몰하고 전사 4명, 부상 19명, 실종 1명의 큰 피해가 난 반면 북한 경비정 한 척(215t)은 30여 명의 인명피해와 함께 선체가 대파됐지만 도주했다.

연평해전 이후 해군은 아군 함정의 우수성과 하늘을 찌를 듯한 사기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선전해 왔다. 그런데 북한의 고물 경비정 한 척과 남한의 현대식 경비정 여섯 척이 격돌한 이번 대결의 결과는 참혹하다.


패배냐 무승부냐


국방부 발표에 의하면 31분간의 교전에서 우리 측은 76㎜ 50여 발, 40㎜ 400여 발, 20㎜ 3000여 발 등 총 3450여 발의 포탄을 쏟아부었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경비정 684호는 自力으로 도주했고, 이 배를 예인하러 온 육도 경비정을 향해서는 단 한 발도 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결과에 의혹이 집중되자 軍은 安基石 합참 작전차장(해군 준장)을 내세워 『충분히 격침시킬 수 있었지만, 그 경우 북측이 유도탄이나 해안포를 쏘고, 그리고 확전이 되면 전면전으로 비화될 가능성이 있어 자제했다』고 설명했다.

千容宅 의원(국방부 장관·국정원장 역임. 민주당 서해교전 진상조사단장), 安炳泰 前 해군참모총장은 『전투나 전쟁에서의 승패는 어느 쪽이 인명피해가 많았느냐가 아니라 전쟁 목적을 달성하면 이긴 것』이라면서 『우리가 NLL을 지켰다는 차원에서 볼 때 이번 해전은 우리가 승리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패전이라고 볼 수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姜永五 前 해군교육사령관(예비역 해군 준장)은 『6·29 해전은 우리 해군이 뭐라고 변명할 수 없는 명백한 패전』이라면서 그 원인을 이렇게 진단했다.

『이번 해전에서 참패한 이유는 「세력의 집중」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연평해전에서는 초계함, 고속정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 발생 즉시 적을 격멸할 수 있었는데, 이번에는 초계함과 고속정이 분산된 상태에서 전투에 돌입했기 때문에 패전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千容宅 의원을 비롯한 다수의 군사 전문가들도 『초계함(PCC)이 고속정 세력과 분산되어 지원·엄호 임무를 수행하지 못한 것은 軍 작전의 기초 교리를 위배한 결정적인 실수』라고 지적했다. 千의원은 『해군은 고속정이 경고방송을 하면 북한 경비정이 즉각 돌아갈 것으로 판단하고 고속정만 들여보냈다가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이라면서 『기습공격 당시 초계함 배치 상황을 보면 이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다』고 말했다.

千의원은 『해군은 초계함이 어망을 피하느라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는 등 국민을 기만하는 변명을 늘어놓지 말고 자신들의 실수를 솔직하게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라』고 지적했다.


군인으로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변명


지난 7월11일 서울 대방동 해군회관에서는 전직 해군참모총장·참모차장, 전직 해병대 사령관 등 중장급 이상 고위 지휘관을 역임했던 20여 명이 모여 해군 측으로부터 6·29 해전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날 金聖恩 前 국방부 장관을 비롯한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金大中 정부의 햇볕정책이 글러먹었다』고 비판했다. 참석자들 중 절반은 해군 작전에 문제가 있었다고 했으며 나머지는 대체로 무난했던 것으로 평했다.

해군·해병대 예비역 고위 지휘관들은 북한의 기습공격으로 교전이 벌어진 직후 357호와 358호 승조원들이 장렬하게 싸워 북측에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 등 분전했지만 작전 과정에서 우리 軍의 적극적이지 못한 행동을 질타했다. 특히 우리의 대응사격으로 무력화된 북한 경비정과 예인하러 온 敵船(388호)을 왜 쏘지 않고 돌려보냈는가 하는 부분에 강력한 의문을 표시했다.

합참의 정동조 전력기획2차장은 7월7일 국방부의 조사발표에서 『가까운 표적에 대해 사격하는 것이 작전관례이기 때문에 끌려가던 684정에 대해서만 집중사격을 했다』고 설명했는데, 익명을 요구한 해군 예비역 제독은 이렇게 반박했다.

『당시 교전 현장에는 우리 고속정이 적탄에 맞아 불타고 戰友들이 죽고 다친 상황이었습니다. 전투는 戰友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명백히 자위권이 발동되어야 할 상황에서 도주하는 敵船과 그것을 예인하는 배를 보고도 擴戰이 두려워 쏘지 않았다는 것은 군인으로서 입에 담을 수 없는 변명일 뿐입니다. 영국의 해전 규칙은 섬멸전, 격멸전입니다. 이런 기준과 원칙으로 볼 때 해군의 대응은 비겁 무능일 뿐이오』

또 다른 인사는 『이번 해전의 가장 큰 문제는 우리 軍이 처음부터 격멸 의지가 없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장에 투입된 6척의 고속정 화력만 가지고도 적을 충분히 격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초계함이나 공군기, 해군 헬기의 지원 여부는 부수적인 문제』라면서 『40㎜ 포의 최적 유효 사거리인 4000~ 4500야드 거리에 있던 고속정 256편대와 253편대가 수단 방법을 가리지 말고 도주하는 북한 경비정과 예인 함정을 끝장냈으면 우리 軍은 영웅이 됐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또 다른 해군 고위 지휘관 출신은 『同居同樂(동거동락)하던 戰友들이 쓰러진 상황에서 일선의 말단 지휘관이 「내가 쏘면 擴戰되니까 도발을 감행한 684 함정만 쏘고 예인하러 오는 배는 쏘지 말아야지」 하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非현실적』이라면서 『누군가가 예인 함정에 대한 사격 포기를 명령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문제와 관련, 7월11일 예비역 장성들에게 상황을 브리핑한 해군 관계자는 『작전 과정에서 합참과 작전사에서 2함대사령부에 몇 건의 지시가 내려갔는데, 그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해 줄 수 없다. 2함대 사령관이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는지 아닌지는 해군본부 차원에서는 잘 모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千容宅 의원 설명


千容宅 의원은 『우리 고속정을 침몰시킨 적 함정에 대해 보복사격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어떤 논리를 동원해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면서도 『지휘관이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작전 상황을 종합적으로 판단한 지휘판단이므로 일반인들이 왈가왈부할 성질이 아니다』라며 이렇게 말했다.

『제가 丁秉七 2함대 사령관을 만나 「왜 도주하는 경비정과 예인하는 경비정을 쏘지 않고 서둘러 사격중지 명령을 내렸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2함대 사령관은 해군지휘전술통제체계(KNTDS)를 통해 당시 정황을 설명했는데,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북한 경비정이 NLL을 넘어 도주하기 전인 10시48분 제천함(PCC)이 북한의 스틱스 미사일 공격모드 전파를 탐지했고, 10시49분에 실크웜 미사일 공격모드 전파를 잡았어요. 10시50분에는 북한 해안포가 전투배치 상태에 돌입하여 사격 징후가 포착됐습니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2함대 사령관은 미사일 경보를 발령했고(이 내용은 국방부가 발표한 「교전상황 개관」에는 나와 있지 않음-편집자 注), 우리 함정들은 사방으로 분산하여 지그재그 기동을 하면서 미사일 레이더파 교란을 위해 채프탄을 발사했어요. 내가 KNTDS를 통해 우리 함정들이 흩어지고 채프탄을 발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千의원은 『해군이 도주하는 북한 경비정과 예인하는 경비정을 쏘았다면 북한에서 미사일이 날아왔을 것이고, 이렇게 되면 초계 비행중이던 우리 전투기가 실크웜 미사일 기지를 자동으로 때리게 되어 있다』면서 『우리가 항공기를 동원하면 북한도 자동으로 항공기가 날아오게 되어 있어 확전을 우려한 丁秉七 사령관이 적절하게 사격중지 명령을 내린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위협론도 논란의 대상이 됐다. 북한의 스틱스 艦對艦(함대함) 미사일은 1950년대 말 舊소련이 개발한 것으로서 앞부분의 레이더로 적 함정을 추적하는 방식이다. 1967년 3차 중동전 때 이집트 해군은 스틱스 미사일 세 발로 이스라엘 구축함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렸으나 1973년 4차 중동전에서는 50여 발을 발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척도 격침시키지 못했다. 미사일 교란 기술이 발달했기 때문이다. 실크웜 地對艦(지대함) 미사일(사정 거리 95km)은 중국이 1970년대에 스틱스 미사일을 개조한 것으로 명중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해군 준장은 『초계함은 많은 인원이 타고 있고 미사일 방어장치가 거의 없기 때문에 분산 이동시킨 것은 적절한 상황 판단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속정은 속력이 빠르고 크기가 작아 북한의 구식 미사일로 고속정을 때리기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증언했다.


金대통령의 4大 수칙이 끼친 영향 논란


우리 함정의 행동을 「경고방송→시위기동→차단기동(밀어내기)→경고사격→조준사격」 등으로 제한하고 있는 합참의 작전例規(예규) 및 교전규칙에 대해서도 많은 문제가 제기됐다. 교전규칙이란 정전상태인 한반도에서 소규모 충돌이 전면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전쟁 예방장치다. 교전규칙은 유엔군사령부가 정하는데 이것을 각 군이 상황에 맞도록 절차를 정한 것이 합참의 작전예규다.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1999년 6월 연평해전이 벌어지기 전까지 우리 해군의 작전예규는 「경고방송→경고사격→격파사격」이었는데 연평해전 와중인 1999년 6월14일 金大中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 『첫째 북방한계선을 지켜라. 둘째 먼저 발포하지 말라. 셋째 상대가 발사하면 교전규칙을 준수해 격퇴하라. 넷째 전쟁으로 확대되도록 하지 말라』는 4大 지침을 지시하면서 시위기동과 차단기동 단계가 더 늘어났고, 이것이 합참 작전예규의 상위개념으로 자리잡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千容宅 의원은 『金대통령의 4大 지침 때문에 교전규칙과 합참예규가 바뀌었다는 주장은 실상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무책임한 발언』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교전규칙은 유엔군 사령관이 만드는 것이고, 그 하위의 실천적 개념으로 합참예규가 있습니다. 우리는 1994년 12월1일부로 미군으로부터 작전지휘권을 환수한 후 각 분야에 대한 작전예규를 만드는 작업에 착수하여 1997년 3월 완성했어요. 이 내용 안에 金대통령이 지시한 4大 수칙이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이번 진상조사 과정에서 「혹시 대통령이 지시하여 합참예규나 교전규칙을 바꾼 것이 아닌가」 하여 합참의 모든 자료를 샅샅이 살펴봤지만 그런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대통령의 지시로 軍이 합참예규나 교전규칙을 바꿈으로써 우리 軍이 작전을 소극적으로 했다는 주장은 무식의 소치입니다』

그러나 姜永五 前 해군교육사령관은 『우리 軍이 사건이 난 지 사흘 만에 「안전한 거리에서 시위기동을 벌인 뒤 경고사격을 할 수 있도록」 합참 작전예규를 바꾼 것은 기존의 방법론에 문제가 있음을 스스로 시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姜昌熙 한나라당 서해 무력도발 진상조사특위 위원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국가 비상사태가 벌어지면 즉시 소집되어야 할 국가안전보장회의(NSC)가 상황 발생 4시간 30분 만에 늑장으로 열렸고, 국방부 장관은 진급자 신고를 받느라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 보고를 받았다. 지휘권을 행사해야 할 합참의장도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한 39분 후에, 북한이 무력도발을 감행한 10분 후에서야 상황 보고를 받았다』면서 『이런 것을 볼 때 이 정권 지도부의 안보의식이 얼마나 해이됐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군인이 정치인 닮으면 안 된다


뿐만이 아니다. 戰死한 해군 장병들의 빈소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는 경기도 성남의 외진 곳인 국군수도병원에 차려놓고, 일반인을 위한 분향소조차 마련하지 않았다. 장병들의 마지막 가는 길인 합동영결식장에는 대통령, 국무총리는 물론 국방부 장관, 합참의장의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다. 우리 정부가 미국, 일본 등 우방국 정부에 『북한의 6·29 도발은 우발적인 것일 가능성이 높으며 냉정하게 대응해달라』고 요청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

西海에서 수십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한 다음날인 6월30일 강원도 속초항에서는 승객 540명을 태운 금강산 유람선이 출항했다. 금강산 관광객 대부분은 정부로부터 관광비를 보조받았다. 이 관광비는 金正日의 현금 계좌에 입금되고 그 돈은 북한군의 전력 강화에 이용된다는 사실이 美 의회보고서를 통해 이미 공개된 바 있다.

千容宅 의원은 『정부의 대응이 비판받아야 할 점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라면서 『햇볕정책 고수 발언, 금강산 관광도 어느 정도 사태 수습 후에 했다면 지금과 같은 비판은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참수리 357호 정장 尹永夏 대위는 조국에 목숨을 바친 代價로 소령으로 1계급 특진 및 충무무공훈장이 추서됐다. 함께 전사한 徐厚源 하사, 黃道顯 하사, 趙天衡 하사 및 실종된 한상국 중사에게는 1계급씩 특진과 함께 화랑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군사령관은 『현실 법정은 개인에 대해서도 정당방위를 인정한다. 우리 장병들이 24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고속정이 침몰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큰 싸움이 두려워 정당방위마저 포기한다는 것은 군인의 자세가 아니라 정치인 같은 생각』이라면서 『어쩌다 대한민국의 軍 지휘부가 전쟁을 두려워하게 되었는가』 하고 비판했다.

전직 해군 고급 지휘관들은 『해군들 사이에 「대양적 기질로 해전성 드높여 뱃사람의 피를 용솟음치게 하라」는 말이 있다』면서 『상황이 어떻게 됐든 현장에 투입된 고속정 지휘관들은 도주하는 북한 경비정과 예인 함정을 격침시켰어야 한다. 국가의 운명을 짊어진 해군 장교들이 그럴만한 배짱도 없는가』 라며 아쉬워했다.●



◈국방부 발표 6월29일 西海 교전 상황



06시30분 고속정 3개 편대(6척) 어로보호 지원차 출항

09시37분 북한 육도 경비정(388호) 남하기동 시작(20노트)

09시46분 북한 등산곶 경비정(684호) 남하기동 시작(17노트)

09시54분 북한 육도 경비정 NLL 침범. 아군 고속정 253편대(참수리 328, 369 대응기동 시작

10시01분 북한 등산곶 경비정 NLL 침범. 아군 고속정 232편대(참수리 357, 358 대응기동 시작)

10시14분 253편대 북한 육도 경비정에 접근, 차단기동. 육도 경비정 침로 변경 북상.

10시15분 2함대에서 232편대에 등산곶 경비정을 3000야드에서 차단기동 지시

10시23분 232편대 차단거리 100야드가 되도록 기동 시작

10시25분 232편대가 등산곶 경비정 함수 차단기동 중 북한 등산곶 경비정이 아군 357호에 집중사격 실시

10시25분 232편대 즉각 대응사격 개시

10시26분 제천·진해함(PCC), 253편대, 256편대에 232편대 지원 지시

10시29분 ○○부대 ○○포 긴급 전투배치

10시30분 공군기 긴급출격 대기 요청

10시30분 256편대(참수리 327, 365호) 격파사격 개시

10시33분 253편대(참수리 328, 369호) 격파사격 개시. 참수리 358호 피격된 357호 예인작업 착수

10시43분 제천함(PCC) 전방이동 격파사격 개시

10시45분 참수리 358호 피격된 357호 2000야드 예인 완료

10시46분 사상자 5명 보고 접수

10시47분 진해함(PCC) 전방 이동, 격파사격 개시

10시48분 제천함, 북한 艦對艦(함대함) 미사일 위협 전자파 탐지(채프 발사)

10시51분 북한 등산곶 경비정 NLL 이탈 북상

10시56분 현장 全 전력 사격중지 지시

11시00분 전속 남하조치 지시

11시25분 제천함·진해함 北 地對艦 위협전자파 접촉(채프 발사). 피해 함정 인원확인 결과 보고(전사 4, 부상 19, 실종 1명)

11시59분 참수리 357호 침몰

입력 : 2006-06-29, 11:08   조회 : 2999
출처 : 무한전진
출처 : 이천칠년 그 영광을위하여 독도는우리땅
글쓴이 : kbp568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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