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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의 숨겨진 영웅

살리는사람 2009. 8. 15. 12:34

"6.25 때 이순신장군이 환생했었다.
소진철교수,“6.25 전쟁사 다시 써야한다.”(4부)
 
최원용 역사전문위원
본 글은 소진철교수의 “6.25 전쟁사 다시 써야 한다.”시리즈의 제(4부)입니다.
(1부) 6.25 전쟁은 처음부터 국제전이었다.
(2부) 6.25 초기방어의 실패는 누구 책임인가?
(3부) 6.25는 72시간 내에 끝내는 전쟁이었다.
(4부) 6.25 때 이순신장군이 환생했었다.
 
 

왜곡된 ‘한국전의 영웅’ 백선엽장군 

우리는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을 ‘한국전의 영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6.25가 발발했을 때 개성을 방어하는 1사단장 시절 초기방어에 실패함으로서 수많은 인명을 죽게 한 무능한 군 수뇌부 중 한 명이었다. 그가 ‘한국전의 영웅’이 된 배경에는 영어 실력과 관운 그리고 특히 백장군 덕분에 목숨을 구한 박정희 前대통령의 비호가 있었을 것이다.

6.25 직전 1사단 앞에 남침 징후가 버젓이 보였음에도 육본에 보고만 하고 자체적으로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고, 6월 24일 저녁에 열린 육본 댄스파티에도 참석해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는, 25일 새벽 4시 전쟁 발발 시에는 자신의 방어구역을 벗어나 서울에 있었다. 군 용어로 위수지역 이탈인 상태였다.

물론 1사단은 파악된 적정을 육본에 보고했던 것으로 보이나, 분명 채병덕 참모총장에 의해 묵살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덩달아 아무런 대비를 취하지 않은 것은 전방 지휘관으로서 책무를 다하지 않은 것으로 봐야 한다. 결국 아무런 대비가 없었기에 전쟁이 발발하자 일방적으로 밀리게 된 것이다.

6.25가 터지자 서부전선의 1사단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북이 밀고 내려오자 그저 도망치는 것이 전부였다. 오히려 인민군은 1사단의 후퇴선보다 더 남쪽으로 깊이 내려갔었다. 인민군 1개 연대가 개성에서 25일 오후 김포 앞까지 내려가는 동안 국군을 보지 못했다는 인민군 장교의 진술이 있다.

물론 백선엽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철저히 지키고,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할 때 가장 먼저 평양에 입성하는 등 전공은 있으나, 낙동강 방어선부터는 미군이 주도해서 싸운 전쟁이지 한국군이 독자적으로 싸운 전투가 아니기 때문에 백장군의 공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다 미군이 만들어 놓은 그물에서 고기만 건진 격이라고나 할까!

전쟁 발발 후 서부전선에서는 힘 한번 못 써보고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내주는 동안 백선엽장군은 전방사단장으로서 한 일이 없다. 그저 한 일이라고는 일방적으로 패해 도망친 것 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한국전의 영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더욱이 현 정부에서는 그런 그를 원수(五星)로까지 추대하려 한다하니 역사왜곡도 유분수라 하겠다. 
 
▲  당시 실세인 미군 앞에서 특히 용감했던 백선엽장군. 미군 군단장에게 작전을 살명하고 있는 사진이다. 미군과 친일파들이 조작한 '6.25의 영웅'일 뿐이다.


 
6.25 때 구국의 영웅은 임부택중령 

(3부)에서 언급했다시피, 6.25는 72시간 내에 수도 서울을 포위하여 UN에서 안보리 결의가 나기 전에 서울을 점령해서는,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통일의회를 구성해 합법적인 ‘남북한 통일정부’가 구성되었음을 전 세계에 공표하는 무시무시한 작전으로 애초 계획되었다.

인민군 제1군단이 서부전선을 맡아 수도 서울을 공격하고, 제2군단이 동부전선을 맡아 오전 중으로 춘천과 홍천을 점령해 국군 6사단을 포위 섬멸한 후, 다시 이천을 거쳐 경기도 수원을 점령해 한국군의 퇴로를 차단하는 원거리 포위작전이었던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 왜 수군의 역할과도 비슷한 것이었다.

25일 새벽 4시 공격개시 명령이 떨어지자, 38선 이북의 인민군 전 병력은 일제히 공격하였다. 국군은 다들 주말 휴가로 무방비 상태인지라 무풍지대로 밀리고 만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작성한 ‘72시간 선제타격작전’은 대성공을 거두는 듯 보였다. 그러나 전 전선이 패하고 있음에도 춘천에서는 국군 6사단 7연대(임부택 중령)가 유일하게 선방을 하고 있었다.

인민군 제2군단 소속 2사단은 소양강 북쪽(춘천근교)에서의 오전 공격이 실패하자 오후에 다시 공격을 감행했으나 많은 병력을 잃어 거의 괴멸되다시피 한다. 2사단의 춘천 점령이 여의치 않자 인민군 제2군단 지휘부는 홍천까지 진출한 7사단을 인제로 끌어 올려 2사단 잔여 병력과 함께 양쪽으로 다시 춘천을 공격하게 한다.

그러나 26일 오후 인민군 2개 사단은 국군 6사단의 완강한 수비에 밀려 병력의 손실만 입고 춘천 점령에 실패한다. 제2군단 자력으로는 도저히 춘천을 점령하지 못한 것이다. 27일 오후 6사단이 육본의 명령에 따라 작전상 후퇴(?)를 하자, 28일 새벽이 되어서야 제2군단이 춘천에 들어오게 된다. 이때는 서부전선의 제1군단이 서울에 입성할 시점과 비슷하다.

즉 초기작전의 개념은 서부전선의 제1군단이 쥐를 독안에 가두어 놓으면, 동부전선의 제2군단이 수원으로 우회해 들어와 뚜껑을 탁 덮는 것이었는데, 그것이 실패하여 독 속에 갇힌 쥐들이 하나 둘 빠져나와 남쪽으로 도망치게 되는 것이다. 즉 계획된 우회작전(수원점령) 없이 그대로 전 전선에서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임기응변의 작전으로 변경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인민군 제2군단은 2사단과 7사단의 합동작전으로 춘천을 공격하였는데 큰 불상사까지 있었다. 즉 양 사단의 경계 부근에서 서로 자기네끼리 교전이 벌어졌다. 그 이유는 7사단의 일부 병력(중공군)이 미제(美製) 병기로 무장을 하였는데 이를 2사단이 국군으로 오인해 공격을 하여 7사단이 큰 피해를 입었다 한다.

이것은 중공군이 개전 초기부터 참전했기에 “6.25는 처음부터 국제전이었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하다. 참고로 인민군은 미제 병기로 무장한 적이 없으므로 중공군이 무장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국공내전 중 장개석군은 미제 병기로 무장했으며, 중공군에게 패해 달아날 때 많은 미제무기를 버리고 갔다. 일부 중공군 부대가 미제 병기로 무장하여 6.25 직전에 파병되었던 것이다. 

결국 인민군 제2군단은 25일 오전까지 춘천을 점령하고 28일까지 경기도 수원을 점령하여 수도 서울을 포위하려는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6.25 전쟁은 72시간 내에 끝나지 않고 지구전으로 가게 된 것이었다. 즉 국군 6사단 7연대장 임부택중령의 선방이 6.25 전체 전략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이 때 만일 임부택중령이 서부전선의 지휘관들처럼 자신들이 올린 정보가 육본에서 묵살되었다고 해서 미리 전쟁에 대한 대비를 안했더라면, 또 24일 밤에 열린 육본 댄스파티에 참석했다면 아마 소련이 구상한 ‘72시간선제타격작전’은 대성공으로 끝났을 것이다. 그랬으면 아마 한반도는 적색으로 통일이 되었을 것이다. 
 
▲   6.25는 '72시간 선제타격작전'으로 동부전선의 제2군단이  72시간 내에 수원을 점령하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춘천전투에서 2사단은 괴멸되고 제2군단의 심각한 전력의 손실을 입는다. 



 
이순신장군처럼 미리 침입에 대비하는 임부택중령 

▲  구국의 영웅 국군 6사단 7연대장 임부택중령
6월 19일 오후 3시 경 국군 6사단 7연대로 인민군 병사 1명이 귀순을 하게 된다. 이 귀순병은 “우리 부대는 지난 6월 12일부터 1주일간 야간행군을 강행하여 신포리 부근 모래밭에 집결했다. 거기서 춘천을 목표로 공격준비 중인데 나는 전쟁이 두려워서 귀순해 왔다”고 진술했다.

국군 6사단 7연대장 임부택중령은 그동안 심상치 않은 적정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터라 즉시 연대수색대를 보내 적정을 탐지하게 했는데, 수색대는 귀순병이 말한 것과 똑같은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화천-신포리 일대의 5번 도로상에 약 400대의 차량이 줄지어 서 있었고, 신포리 부근 모래밭에는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집결하고 있다. 그리고 구만리-화천 간에는 수십 문의 야포가 포구를 남쪽으로 하여 병렬되어 있었다.” 

임중령은 즉각 이 사실을 신임 6사단장(김종오대령)에게 보고하고, 주말에 실시할 외출.외박은 춘천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게 통제하고, 이를 육본에 보고했으나 육본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러나 사단은 자체의 정보를 토대로 참호를 파고 토치카를 설치하는 등 적의 공세에 대비하여 철저히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것이 초기에 적 2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부전선의 모든 지휘관들은 이러한 적정이 무수히 있었음에도 자체적으로도 무시했고 육본에서도 묵살을 했다. 그래서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말에 많은 병력을 외출.외박을 내보내고, 심지어는 자신들도 24일에 열린 육본 댄스파티에 참석해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결국 몇 시간 후 전쟁이 일어나자 서부전선은 와르르 무너져 수도 서울을 3일 만에 내주는 처참한 지경을 당하고 만다. 반면에 동부전선의 6사단은 제2군단의 공격을 초전에 박살내어 6.25의 기본 작전인 ‘72시간 내 서울포위작전’까지 무산시키는 쾌거를 이루어, 소련이 구상한 ‘통일의회’도 구성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미군이 상륙하여 참전할 시간까지 벌었던 것이다.

이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처럼 나라를 풍전등화의 위기에서 구한 행동으로 당연히 6사단 7연대장 임부택중령이 ‘6.25전쟁(한국전)의 영웅’으로 선정되었어야 옳은 것이다. 임부택중령이 아니었으면 낙동강 전선도 맥아더원수의 인천상륙작전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  춘천대첩 기념공원의 모습. '춘천전투'가 아니라 '춘천대첩'이란 말은 온당한 표현이다.  
▲   춘천시장이 세운 춘천대첩비문. 내용이 옳다.

초기방어를 제대로 못해 일방적으로 패해버려 많은 인명을 죽게 한 서부전선의 지휘관이 일부 정치군인들에 의해‘한국전의 영웅’이 되어 버린 현실이 참으로 개탄스럽다. 이는 친일청산을 하지 않아 국가정의를 못 세운 이승만대통령과 박정희대통령이 만든 작품(?)으로 보아야 한다.

이후 임부택중령은 음성전투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인천상륙작전 후 북진할 때는 선두에 서서 압록강의 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대통령에게 보낸 장본인이었다. 그 공으로 무공훈장이 수여되자 임중령은 “내가 춘천전투에서 1개 연대병력으로 인민군 2개 사단을 괴멸시켰는데 그걸로는 훈장을 안주고, 압록강 물 떠다 바쳤다는 전공으로 무공훈장을 주겠다고 하여 훈장수여를 NO한 적이 있다."는 일화가 있다.

참으로 개념 없는 대통령과 한심한 친일파 군부라 아니할 수 없다. 일본 육사출신 친일파 장군들이 주도한 초기 대한민국 군부는 임부택중령이 세운 춘천전투의 전공이 사실대로 밝혀지면 서부전선에 있던 자신들의 과오가 밝혀지는 것을 꺼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행위이다.

▲  임부택연대장이 지휘하는 부대는 압록강에 가장 먼저 도착하여 물을 떠다 경무대로 보낸다.

 
임부택중령에게 완전 괴멸된 인민군 2사단은 춘천전투 후 없어져 13사단으로 재편성이 된다. 인민군에게 있어 2사단은 며칠간 있다 사라진 아주 불명예스러운 사단이었다. 임부택중령은 그의 혁혁한 전공에도 불구하고 친일장군들처럼 4성 장군이 되지 못하고 2성 장군으로 예편한 후 기업인으로 활동하다 지금은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모셔져 있다.

진정한 ‘구국의 영웅’ ‘6.25전쟁의 영웅’이 누구였는지 우리는 반드시 재평가 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의 수호신이며 신성한 국토방위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군에서조차 왜곡된 역사가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군에서라도 올바른 국가정의가 바로 서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6.25 때 하늘이 내려준 구국의 영웅 임부택장군의  명복을 비는 바입니다.
▲   임진왜란 때 이순신장군처럼, 6.25 때 구국의 영웅인 임부택 에비역 소장.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아래는 구국의 영웅 임부택장군의 약력이다.
1946. 6.15. 육사 1기 졸업,          
1948. 8. 육군본부 작전국 작전과장
1949.12. 제6사단 제7연대장               
1951.11. 제5사단 부사단장 겸 사단장 대리

1952. 8. 육군 준장 진급, 제11사단장       
1954. 5. 육군 소장 진급,
1954.10  국방부 제1국장                
1955. 3. 부산대학교 법대 졸
1955.10. 진해 육군대학 졸업               
1956. 6. 연합참모본부 제3부장
 
1957. 8. 제1군 사령부 참모장             
1959. 6. 미국 지휘 참모대학 졸업
1959. 7. 제2군 관구 사령관                
1960. 2. 제3군 관구 사령관
1960.10. 제1군단장                        
1962. 3.15. 의원 예편  

1973. 2. 한국 비료 공업(주) 상임감사     
1980. 11. 대한 화재해상 보험(주) 거산 대리점 운영
1984. 10. 한국 자동차 보험(주) 거산 대리점 운영
1986. 11. 해동 화재해상 보험(주) 고문 취임    
1993. 8.  대한민국 참전 연합회 회장
2001.11. 별세, 대전 현충원에 안장.


기사입력: 2009/08/14 [14:21]  최종편집: ⓒ 단재매일신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