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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시간 짜리 작전계획 6.25

살리는사람 2009. 8. 13. 15:17

편집 2009.08.13 [14:49]
“6.25는 72시간 내에 끝내는 전쟁이었다.”
소진철교수,“6.25 전쟁사 다시 써야한다.”의 (3부)
 
최원용 역사위원
드디어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해 인민군은 38선 전역에서 전면 공격을 감행하였다. 소련 군사고문단이 수립한 기본 작전은 “72시간(3일) 이내에 수도 서울을 포위하여 전쟁을 끝낸다.”는 계획이었다. 수도 서울을 포위한 후 남한의 무소속 국회의원들과 ‘남북통일의회’를 결성해 ‘남북한 통일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전 세계에 선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미국은 대한민국을 돕기 위해 군대를 상륙시키고 싶어도 상륙을 못하게 된다. 소련이 6월 25일 일요일 새벽을 D-Day로 잡은 것도 그 날이 미국 시간으로는 토요일 오후이기 때문이었다. 월요일 유엔이 사태를 파악하고 안전보장이사회를 소집해 회의를 할 때 전격적으로 전쟁을 끝내 버린다는 계획이었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작전계획이었다. 

▲    소련군사고문단과 작전계획을 상의하는 김일성                                                                            © 편집부


 
인민군의 작전계획은 ‘72시간 내 수도 서울을 포위한다.

이를 위해 인민군은 동두천/포천->의정부->서울 축선을 주공(主攻) 방향으로 하고, 개성->문산->서울을 조공(助攻) 방향으로 하여 서부전선 일대에 제1군단을 배치한다. 제1군단에는 제1사단, 제3사단, 제4사단, 제6사단, 105탱크여단이 속해 있었고, 군단장에는 인민군 훈련국장 김웅소장이 배치되었다.

동부전선에는 인민군 작전국장 김광협소장이 지휘하는 제2군단(제2사단, 제5사단, 제7사단, 자동포대대가 소속)이 배치되었으며, 제2군단 중 제2사단의 임무는 당일 춘천을 점령하고, 제7사단은 홍천을 점령하여 춘천에 있는 국군 6사단의 퇴로를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 48시간 내에 춘천->홍천->이천->수원으로 진출하여 수도 서울의 퇴로를 차단하여 국군을 전면 포위하는 전략이었다. 서부전선의 제1군단의 목표는 수도 서울 점령이었고, 동부전선에 있던 제2군단의 최종 목표는 경기도 수원 점령이었다. 이 모든 작전이 72시간 내에 종결하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6.25 작전까지 인민군 작전국장을 했던 김광협소장이 제2군단장으로 배치된 것을 보아도 제2군단의 임무가 얼마나 막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 6.25전쟁의 성패는 72시간 내에 제2군단이 수원을 점령하느냐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부전선의 1군단이 서울에 있는 쥐들을 독 안으로 가두어 놓고, 제2군단이 수원을 점령함으로서 쥐들이 갇혀있는 독에 뚜껑을 덮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제2군단의 2사단이 춘천 점령에 실패함으로서 이 작전계획은 차질이 빚어지게 되었다. 

서부전선의 제1군단은 72시간 내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여 쥐들을 독 안으로 잘 몰아넣었으나, 동부전선에서 제2군단의 2사단이 춘천 공략에 실패함으로서 72시간 내에 수원을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결국 독에 뚜껑을 덮지 못하여 갇혀있던 쥐들이 탈출하여 남쪽으로 도망가게 되는 것이었다. (필자가 ‘쥐들과 독’이란 표현을 쓴 것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유이니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6.25가 새벽 4시에 발발했으나 국군의 명령체계는 오전 10시경이나 이루어졌다. 채병덕참모총장은 6.25 당일 새벽까지 마신 술로 전황보고를 받을 수 없는 상태였으며, 신성모 국방장관은 “일요일을 방해받지 않겠다.” 하며 전화기를 내려놓고 있어 연락이 되지 않았고, 게다가 군 작전의 실무책임을 맡고있는 작전국장 장창국대령은 며칠 전 이사를 해 전화도 주소도 알 수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참으로 대단한(?) 대한민국 국군 수뇌부였다. 

▲  소련군사고문단이 5월에 작성한  6.25 전쟁(72시간 선제타격작전)의 기본지도



서부전선의 사단장들은 아무런 대비가 없었다.

국군은 서부전선의 1사단(개성), 7사단과 2사단(의정부)의 지휘관들이 영혼이 없는(얼빠진) 군인들인지라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뚫리고 만다. 병력의 대부분이 휴가로 자리를 비운 탓도 있었겠지만, 다들 미리 적정을 알고도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았고 모두 6월 24일 밤 육본 댄스파티에 참석해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보겠다.
(1사단 지역) 1950년 6월 24일 옹진반도 국군 17연대 전면에 인민군 증강, 모든 포신이 남쪽을 지향. 군관들이 남쪽을 지속적으로 관측하는 것이 목격되었다.
(7사단 지역)
* 1950년 6월 22일 동두천 1연대에 인민군 전사가 귀순하여 “남진을 위한 38선 지뢰해체 명령을 받고 탈영했다.”고 진술했다.
* 1950년 6월 24일 국군 1연대 정면 초성리 북쪽 고지에서 인민군 군관들이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 1950년 6월 24일 국군 9연대는 양문리 38선 2킬로 전방 고지에 인민군 군관들이 지도를 펴고 남쪽 지형을 관찰하는 모습이 목격되었다.

당시 개성 지구를 맡고 있던 1사단장은 백선엽대령이었고, 동두천/의정부 지역의 7사단장은 유재흥준장이었다. 둘 다 적정을 미리 알고도 대비를 전혀 하지 않아 6.25 초기 방어의 실패로 국가를 망국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던 군인들이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이후 두 사람은 승승장구하게 된다.

백선엽대령은 참모총장을 지냈으며,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며, ‘6.25 전쟁의 영웅’이 되었고, 최근에 국가에서 원수(五星)라는 칭호까지 부여한다고 한다. 유재흥장군은 군의 최고직인 국방부장관까지 지낸다. 

초기방어에 실패해 수십만명을 죽게 한 친일파 장군들이 상관(?)을 잘 만나 오히려 ‘6.25의 영웅’이 되고 군의 최고지위에까지 오르게 되는 대한민국은 정말로 이상한 나라라 아니할 수 없다. 그 이유는 해방 후 대한민국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처단하지 못하여 국가정의를 세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일방적으로 밀리는 서부전선의 국군

개성->문산->서울 축선에 대해 말하자면, 6.25 당일 오전 9시경 국군 1사단(백선엽대령)이 방어하던 개성이 인민군 6사단에 의해 점령당했다. 그 후 인민군은 국군의 저항을 별로 받지 않고 남하해 25일 당일 영정포에서 1박하고 26일에는 김포반도까지 진군하고 강화도를 접수할 예정이었다는 진술이 있다. 

한 인민군 간부는 “당시 우리가 진군 중 남쪽 군인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으며, 김포 앞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국군 패잔병들이 지나가면서 우리를 국군으로 알고 경례를 붙이더라. 그냥 보내주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즉 인민군은 국군 1사단의 후퇴선보다 더 남쪽까지 깊숙이 내려갔던 것이다. 이게 당시 국군 1사단의 실상이었는데도 어떻게 당시 지휘관인 백선엽장군이 ‘6.25의 영웅’이 될 수 있단 말인가!!!

한편 인민군의 주공 부대인 4사단은 25일 동두천을 점령하고 오후 늦게 동두천 남방 8km까지 진출하여 의정부에 육박하였다. 인민군 3사단은 하루 종일 진군하여 포천 남방 10km까지 진출하여 의정부를 위협하였다. 즉 3일 작전의 가장 중요한 거점인 의정부 점령이 목전에 있었던 것이다.

▲  의정부전선에서 국군을 지휘하는 채병덕참모총장. 그는 후방부대를 의정부전선에 계속 축차투입하여 많은 전력의 손실을 가져왔다.                                                                                                                                        © 편집부


26일 하오 늦은 시각에 의정부가 점령당함으로서 서울 방어선이 와해되었다. 이 때 국군은 의정부를 사수하기 위해 후방부대를 축차적으로 투입하는 바람에 군 전투력에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인민군은 72시간 작전 시나리오에 맞추기 위하여 의정부 점령 후 계속 진격하지 않고 하루를 지체한다.

결국 국군은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까지 격파 당하면서 인민군에게 수도 서울을 내어주고 만다. 인민군의 서울 입성으로 ‘72시간 선제타격작전’은 외견상 성공한 듯 보였으나, 동부전선의 인민군 2사단이 제 때 춘천을 점령하지 못하여 전체적인 작전에는 큰 지장이 초래되게 되었다.

인민군이 의정부 점령 후 27일 하루를 허비한 것은 너무 일찍 서울에 입성하면 전체적인 72시간 작전에 지장을 초래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서울 입성 후에도 바로 한강을 넘어 진격하지 않고 3일을 서울에서 허비한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근본적인 것은 당시 인민군의 작전이 72시간까지만 수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인민군 주공부대(제1군단)의 임무는 서울을 점령하고는 동부전선의 제2군단이 한국군을 포위하기 위해 후방인 수원을 점령할 때까지 대기하는 것이었고, 또 병력이 지쳐있었고 한강 도하장비가 없었기 때문이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72시간 내에 모든 상황이 종료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72시간 포위작전’은 뜻하지 않은 복병이 나타나 예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즉 인민군 2사단이 춘천을 점령하지 못하고 국군 6사단 7연대에게 괴멸됨으로서 ‘서울포위작전’의 핵심인 수원 점령이 물 건너가게 되어 독의 뚜껑을 못 닫게 된다. 즉 ‘남북통일의회’를 구성하여 ‘통일국가’임을 전 세계에 선포하여 미군 상륙을 저지하려는 소련의 계획이 완전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인민군 2군단은 춘천의 전투상황을 중앙에 제대로 보고하지 않음으로서 인민군의 전체적인 추가 작전에 큰 지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결국 춘천 전투가 6.25 전쟁의 성패를 가름했던 것이다. 결국 인민군 2군단의 작전부장은 해임되어 후일 13사단 참모장으로 강등된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인민군 2사단이 춘천 공략에 실패함으로서 “이렇게 되면 6.25전쟁에 미군이 개입하게 되어 이기기 어려운 전쟁으로 지구전이 될 것”임을 예견했다고 한다. 또한 소련은 72시간 작전을 수립할 때 한국군의 능력을 너무 경시한 반면 북한군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 같다는 진술도 했다.

한강 인도교가 폭파되고 수도 서울이 함락되었음에도 남한의 라디오 방송은 “국군은 계속 승리하고 있다. 점심을 평양에서 먹고 저녁에는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다.”고 방송되고 있었다. 이를 믿은 시민들은 피난 갈 준비도 안하고 멍하니 있다가 인민군의 서울 입성을 목격하고서야 이 방송이 엉터리였음을 알게 된다. 이미 이승만대통령은 한강 다리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간 상태였다.  

▲  서울에 입성하는 인민군 군대. 서울시민은 정부의 발표를 믿고 피난도 가지 않았다.     ©편집부